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사군 한반도설 식민사관 주장 사건 (문단 편집) === 최초 낙랑군 시대 유적 발견은 식민사관과 무관했다. === >도쿄제국대학 공과대학 조교수였던 세키노 다다시(關野貞)는 식민지 시기 한국에서의 고적조사를 주도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. 그는 1902년과 1909년에 한국에 방문하여 고적을 조사했는데, 1909년의 조사에서 대동강 유역의 석암동 고분을 발굴·조사하였다. 그는 처음에는 이 고분을 고구려 고분으로 보았다가 훗날 견해를 수정하여 낙랑군 시대의 유적으로 보았다. 이 때문에 일제가 고구려 유적을 낙랑군 유적으로 조작하여 ‘한사군 한반도설’을 고고학적으로 뒷받침하려 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.(이덕일, 2014, 우리 안의 식민사관, 만권당, 69~73쪽) 하지만 이것은 '''당시 세키노의 사전 지식 부재 때문에 생긴 일이며 오히려 최초의 낙랑고분 발굴조사가 식민사관 창출을 위해 사전 기획 하에 이루어 진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게 하는 사례일 뿐'''이다.(정인성, 2006, 「關野貞의 낙랑유적 조사·연구 재검토」, 호남고고학보 24) >---- >위가야(성균관대학교 사학과 박사수료), ‘한사군 한반도설’은 식민사학의 산물인가 1[[http://www.ikaa.or.kr/webzine/read.php?pid=8&id=45&PHPSESSID=27b3468aad48569b098d5553ece57ce4|#]] 다시 말해 세키노 다다시에게 낙랑군 시대 유적이 발견된 건 우연이었다.[* 애초에 역사에 우연의 개입이나 영향력이 크다는 건 [[포스트 모더니즘]]계열에 옛날부터 지적된 바이다. 조지형, 랑케 & 카 (역사의 진실을 찾아서), 2006; 한국사학사학회, 21세기 역사학 길잡이, 2008 에서 포스트 모더니즘 에 대해 확인해보자. ] 내용을 좀 더 추가하자면 세키노 타다시는 석암동 고분군의 전실묘(벽돌무덤)을 조사한 후 고구려 무덤이라고 주장하였다가 이에 반대하는 도리이 류조(鳥居龍藏)와 논쟁을 벌인 바 있다. 이후 황해도에서 장무이묘를 발굴함에 따라 견해를 수정한 것이다.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고구려 무덤, 한사군의 무덤에 대한 개념 자체가 확립되어있지 않은 시기였으며[* 어찌보면 당연한 이야기인 것이 당시는 한반도에서의 근대적 의미로의 고고학이 이제 막 나타나던 시기인 만큼 고구려 뿐 아니라 백제, 신라의 유적과 유물에 대한 개념도 잡혀있지 않던 시기이다.] 평양 및 그 일대에서 확인되는 유적은 '당연히' 고구려일 것이라 생각했다. 한사군은 [[아오안]]이었던 셈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